해녀 굿

정의

해마다 음력 2월 초하루와 열나흘 날 사이에 제주도 해안가 마을의 본향당에서 바람의 신인 영등신을 맞이하여 풍어 및 해상안전과 해녀들의 채취물인 소라·전복·미역 등의 풍성을 기원하는 굿. 여러 마을에서 행해지는 영등굿 가운데 제주시 건입동에서 행해지는 영등굿은 특별히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라 하여 1980년 11월 1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고, 1986년 11월 1일 단체로 인정되었으며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사

조선조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8 제주목 풍속 조에 “2월 초하루에 제주의 귀덕(歸德), 김녕(金寧), 애월(厓月) 등지에서 영등굿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귀덕과 김녕 등지에서는 나무 장대 12개를 세워 놓고 신을 맞아 제사했다 하고, 애월에 사는 사람들은 약마희(躍馬戱)를 하여 신을 즐겁게 하다가 보름날이 되면 파했는데 이를 연등(燃燈)[영등]이라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약마희에 대한 해석에는 다소 이견이 있다. 이 부분의 원문은 ‘涯月居人 得槎形如馬頭者 飾以彩帛 作躍馬戱’이다. 이 가운데 ‘槎(사)’ 자를 ‘나무 또는 나무등거리’로 해석하는지 혹은 ‘뗏목’으로 보는지에 따라 견해가 달라진다. 나무 혹은 나무 등거리로 해석하여 나무가 말머리 모양 같은 것을 얻어 이를 채색비단으로 꾸며 말이 뛰는 놀이인 약마희를 하였다고 해석한 자료가 있는가 하면, 뗏목으로 해석하여 떼배를 말머리 모양으로 만들어 이를 채색비단으로 꾸며 약마희를 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약마희는 바다에서 놀아졌던 경조민속(競漕民俗) 놀이가 되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자료에는 또한 “이 달에는 배타는 것을 금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러한 제주도의 영등굿에 관한 내용들은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의 『탐라지(耽羅志)』를 비롯해 헌종 15년(1849)에 편찬된 홍석모(洪錫謨, 1781~1850)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비슷하게 나온다. 이로 보아 제주도의 영등굿 역사는 최소한 500년 이상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용

제주도 사람들에게 영등굿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영등의 때가 되면 잔잔한 바다와 풍어를 기원하는 여러 굿이 섬 전역에 걸쳐 벌어진다. 이들 굿 가운데 칠머리당에서 열리는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이 가장 중요하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이라는 이름은 바람의 여신에 대한 굿임을 의미하지만, 마을의 여러 수호신과 바다의 용왕에게 바치는 굿이기도 하다.
영등은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바다를 휘저어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한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영등이 섬에 와 있는 2월 초부터 중순까지 제주의 바다는 특히 험난하다. 섬사람들은 영등이 지나가는 자리의 바닷가 조개류는 껍질만 남게 된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영등신이 조개류의 속을 다 까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등이 떠나는 날이 되면 영등은 해안을 따라 씨를 뿌려주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며, 영등이 떠나면서 바다를 다시 맑게 해서 해조가 잘 성장하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등이 머물고 있는 때는 가장 중요한 때이며, 사람들은 영등에게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면서 칠머리당에서 굿을 벌여 영등이 머무는 기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영등굿이 치러지는 마을 이름(건입동의 속칭이 ‘칠머리’이다)을 따서 이름 붙인 칠머리당이라는 사당에서는 영등, 그리고 도원수감찰지방관(都元帥監察地方官)과 요왕해신부인(龍王海神夫人)이라는 부부신(夫婦神)을 모신다. 도원수감찰지방관은 지역민의 요구(도원수감찰지방관이 영역)를 담당하는 신이며, 요왕해신부인은 어부와 해녀의 생계(요왕해신부인의 영역)를 담당하는 신이다. 사당에는 아래의 표와 같이 남녀 신의 위패를 모신다.

음력 2월 1일이 되면 칠머리당에서는 영등신이 들어오는 영등환영제를 열고 2월 14일에는 영등송별제를 연다. 산신을 모시는 제사(당제)는 한국의 여러 지방에서 음력 정월에 거행되는데, 제주도의 여러 촌락에서도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산신을 모시는 제사와 영등을 모시는 제사는 오직 제주도에서만 ‘영등굿’이라는 하나의 무속 제례와 결합되어 있다. 단순한 영등환영제와 비교할 때, 무속 제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 간주되며 용왕에 대한 제사까지 포함하고 있는 영등송별제는 그 행사가 매우 화려하고 더욱 중요하다.
영등환영제는 신령을 불러 사당으로 들이는 것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행운을 비는 초감제(初監祭)로부터 시작하여,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로 이어진 뒤 조상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3막 연희인 석살림굿으로 끝낸다.
영등송별제도 역시 초감제로 시작하지만, 거기에는 마을의 사당으로 들어오는 의례 본향듦이 포함되어 있다. 본향듦은 마을의 수호신인 남녀 부부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해신부인에게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것이다. 이 제례에서는 3명의 고을 관리가 부부 신에게 술을 올리며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소원을 빈다.
그 다음에 모든 신에게 술과 떡을 권하여 올리는 추물공연, 용왕과 영등을 맞이하여 그들에게 풍어와 어부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요왕맞이, 수수의 씨로 점을 치고 해조류의 씨를 뿌리는 행사인 씨드림이 이어진다. 그 다음에는 수탉을 던져 마을 전체의 재앙을 막기 위한 도액막음을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해녀들을 위해 점을 치는 순서도 있다. 그 다음에 마을의 노인들이 바다에 짚으로 만든 배를 띄워 보내는 배방선이 이어진다. 영감놀이는 배상선 앞에 ‘굿중놀이’로 삽입되어 있다. 영등송별제는 마지막에 여러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으로 끝맺는다.

예능보유자 / 기능보유자

칠머리당 영등굿은 1980년 안사인(安士仁, 1928~1990) 심방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으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현대화의 물결에 따라 굿이란 위험한 미신이라는 부정적인 견해가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제주도의 어부들은 심방과 함께 깊은 계곡이나 바다의 동굴을 찾아 은밀하게 치성을 드렸다. 그러다가 그 제례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71호로 지정되면서 이 의례는 살아나게 되었다. 안사인은 제례를 부흥시키기 위해 여러 심방과 협회를 조직하여 유산을 지켰다. 창립 회원 가운데는 오늘날의 예능보유자 김윤수, 고문 양창보, 강사 고순안 등이 있다. 제주도에서 영등굿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했던 안사인이 세상을 떠나자, 1995년 김윤수(金潤受)가 제2대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2009년 현재 칠머리당 영등굿 보존회에는 40명의 회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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